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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특집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

십자가 고난의 비밀을 보라작성일 : 2019.09.01

인간의 모든 노력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긍정적인 면에서 행복을 잡기 위해 달려간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이다. 고난은 행복으로 나가는 길의 걸림돌이며 행복의 방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 중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눈여겨보아야 할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그동안 죄의 법으로 다루어오던 임산부의 낙태를 합법화시키는 판결을 내린 일이다. 특히 이는 생명의 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에 커다란 도전이었다. 낙태의 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첫째 이유는 육아로 인한 고통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지만 국민 여론은 7대 2로 낙태의 합법화를 압도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현 시대의 풍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대인의 특성 중 하나는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내는 고통에 대한 것인데, 인내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인내하도록 원인 제공하는 고통의 요인 자체를 없애거나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인내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농부의 농사를 비롯하여 태아를 임신하여 출산할 때까지 모든 것들이 기다림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고통을 지나 주어지는 감격의 기쁨의 날을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긍정적인 면에서 행복을 잡기 위해 달려간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이다. 고난은 행복으로 나가는 길의 걸림돌이며 행복의 방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인간의 일생은 행복을 잡기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고난을 없애는 일이 우선과제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 없는 삶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걱정, 근심, 염려의 문제로 인한 고난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죄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한, 고통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
사실 성경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안정된 곳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과정 자체가 고난의 역사이다. 그리고 믿음의 성도들이 천국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 자체도 가나안에 도달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광야에서의 고난의 과정이다. 죽음이 없이 부활이 없고,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듯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이를 수 없다. 이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훈련방법이다. 세상도 그러하다.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의 여관과 같고, 바로 이러한 과정의 길 위에서(Being on the way) 세상은 천국시민이 되기 위한 훈련장이다. 훈련은 고난이고 이러한 고난의 훈련 없이는 악한 무리와의 영적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에 대해 맞서라 마라 할 것도 없다. 싫던 좋던 우리의 삶은 고난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한, 그리고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악한 세상에 존재하는 한 고통과의 싸움은 필연적인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고난의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를 해결하고 답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표적인 고난의 인물, 동방의 의인 욥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신이 받는 고통 자체보다도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 답답함과 억울함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고난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인간 고통의 출처는 어디인가? 고난의 궁극적 실체는 죽음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 절망스런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성경은 이 죽음이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해결의 길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죄와 사망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에 이를 위해 뛰어드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먼저 고난 받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숙명론적인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인간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며 십자가 고난의 비밀이다.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라
고난의 문제는 모든 인류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 풀어야 할 인류 최대의 과제이다. 이 고난의 문제를 풀어가는 길이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난의 문제에 대해 성경은 여러 관점에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첫째로, 인류 역사에서 고난은 세상 끝 날까지 항존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 끝날에 가서야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과 함께 모든 고난의 문제가 종결된다는 것을 성경적 관점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우주적 관점에서 고난은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는 점이다.

둘째로, 고통의 종류이다. 육혼영(肉魂靈)에 대한 구분으로서, 육신에게 닥친 질병 등의 고통, 혼적으로 마음을 어렵게 하는 고통 그리고 영이 병들어 생기는 죄책감 등의 고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자연재해적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도 있다(어떤 환경연구가들은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도 인간의 책임이라 말한다).

셋째로, 고통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 할 고통 원인의 실체는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것만이 아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엡 6:12). 그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약 1:15). 이 욕심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그리고 병들게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므로 욥에게처럼
고난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낄낄거리며 즐기는 마귀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시험(유혹)과 시련(연단)을 구별해야 한다. 스트레스(stress)와 십자가(cross)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스트레스는 피해야 하지만, 십자가는 달게 지고가야 한다. 훈련은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지 우리에게 이유 없는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닌 것처럼, 우리에게도 더 나은 굳건한 믿음을 갖기 위해 때로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시련(trial)을 주시되, 그 자녀들을 그 누구도 시험(유혹, temptation)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약 1:14) 때문이다.

다섯째로, 고통에 대한 대처 자세이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저 사람이 겪는 고통이 당장 내게 닥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 나에게도 저런 고통이 그리고 저 사람 보다도 더 심한 다른 양상의 고통이 내게 닥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겸허한 자세로 고통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내게도 닥치게 될 미지의 고통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두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죽음의 문제 같은 것이다. 회자필리(會者必離)-만남은 반드시 이별도 있다는 격언을 새겨두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이 미래에 닥칠 미지의 고통들에 대처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또 사도 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죽음에 대해서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떠올릴 때 우리는 신정론(神正論)을 들먹이며 하나님은 정의로우신가, 왜 악인을 멸하지 않고 의인의 고난을 묵고하시는가, 심지어는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없다고까지 항변하고 나선다.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만 보고, 무덤을 깨치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의 면류관은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아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신 무서운 진노의 율법적 아버지만 바라보았지, 아들의 죽음에 심히 통곡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는 못 보았던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울부짖는 고통의 신음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외면하시는 냉정한 아버지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아비가 아들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하는가, 그런 무자비한 아비는 없다. 어린아이가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우리들이 그러하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떠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집 떠난 아들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서만 골몰하며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회피하려 하지 말고, 내 욕심으로 인한 것이 아닌 한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이제 ‘나의 고통’ 차원에서 ‘이웃을 향한 고통’에 눈을 뜨고 다가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 중에 처할 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찬송하며 나를 향한 고난(환난)의 의미를 깊이 새겨 볼 일이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4~5).†

조규남 (목사)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기독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자료제공 : http://www.shinang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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